Somewhere near New York Essay Series 4

04. 뉴욕의 아트씬에서 건져올린 나의 보석들


사실 서울에서 미술이란 나의 유희가 못 될 때가 많았다. 서울에는 미술관 말고도 재미있는 곳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관과 연관된 좋은 기억들은 많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 산중턱에 나오는 과천 현대미술관 안에서의 그 서늘한 공기를 좋아한다. 커다란 건물의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의 햇살 아래에서 행복하다. 아트선재센터에서 김희천 신작을 오래 바라보다가 께느른해져 잠들기 좋던 소파의 푹신함이 인상깊고 호 모양으로 생긴 전시장의 어두컴컴한 모양이 신비롭다. 등등. 그러나 정작 미술을 감상할 땐 좋아하는 전시가 아니라면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빨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오는 날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술로 돌아가자고 생각하며 뉴욕에 왔다. 그러나 확실하게, 뉴욕에서 미술관 구경은 의무였다가 다시 유희가 되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괴로움 덕에 오히려 미술관을 빠르게 훑어버리는 일들은 산뜻하고 즐거웠다가도 그 중에서도 무언가를 주워올리고 싶어졌고, 멤버십 덕에 돈 내지 않고도 미술관을 쏘다니는 재미가 있어서 아주 열심히 다녔다. 뉴욕에 가기 전엔 가서 큐레이터라는 꿈을 이룰 방법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작 뉴욕에 와선 깨달았다. 미술 그 자체보다도 미술을 둘러싼 공간, 이야기, 의미, 인정받기 전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무언가를 일찍 알아보는 것으로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그 희망 같은 것이 사람을 잡아끄는구나. 그러니 전통적인 형태의 큐레이터가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인진 스스로에게 거듭 묻고 물으며 나아가야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아트씬은 계속 나를 놀라게 했고, 즐거운 구경과 더불어 배울 점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 인사이트들을 간단히 나눈다.




1. 고요한 미술관에 대한 사랑과 그 뒤편의 멤버십 제도

사람이 드문드문 지나가는 텅 빈 고요한 공간에 혼자 있다 보면 느껴지는 차분함. 사람 없는 아침의 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지만, 뉴욕에서는 꽤 어려운 일이다.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뉴욕에 사람이 너무나도 많고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술관의 멤버 아워는 사람 없는 미술관을 가능하게 한다.

뉴욕에 가기 전 미술관 멤버십을 끊고 매일매일 미술관에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마(Museum of Modern Art), 구겐하임(Guggenheim), 휘트니(Whitney) 세 곳, 그리고 미국미술관협회(AAM)의 학생 멤버십을 끊었다. 뉴욕에서 미술관을 가는 일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였지만 결국은 미술관 멤버십을 잘 끊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건 미술관들이 갖춘 멤버 전용 혜택 덕분이었다. 가입하면 일정액은 세금 환급을 해주는 데에다, 하루에 다 보기 힘들 정도의 방대한 컬렉션과 샵의 풍부한 판매 품목 덕에 무료입장과 게스트티켓, 디자인샵 할인과 같은 기본 혜택들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멤버십의 꽃은 멤버 아워/멤버 나잇이다. 오직 멤버들을 위해 미술관을 개방하는 시간에는 평소라면 인기 덕에 마주하기 힘든 작품들과 독대할 수 있었다.



가입하면 우편으로 보내주는 편지. 세금 환급의 증거로도 활용될 수 있단다.


게다가 모마는 멤버 이브닝에 테라스 조각 정원에 의자를 두고는 와인이나 맥주를 한 잔씩 주었고, 휘트니의 멤버 나잇은 디제이를 초대해 디제잉을 들으며 1층에서 춤을 추다가 칵테일에 은근히 취해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은 우연한 만남이 벌어지기도 딱 좋아서, 모마에서는 이란에서 오셨다는 멋진 벨트를 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처음 만난 사람의 인생사와 인생관을 들었고(자신이 잘못한 일에는 신의 개입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벌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인상 깊다), 휘트니에서는 내가 끼적이며 그린 그림 위에다가 자기 그림을 겹쳐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화장실에 우리의 작품을 몰래 전시하기도 했었다. 구겐하임에는 그런 행사는 없었지만, 그 고요함 자체가 충분한 선물이었다. 몇 명의 노인들과 두세 명의 젊은이들을 스쳐 지나가며 구석구석 건물에 대한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두 시간 즈음은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날 처음으로 찾아낸 리딩 룸-세실리아 비쿠냐의 시집들을 읽어볼 수 있고 자기만의 작품도 만들 수 있는-에서 만난 직원이 ‘구겐하임에서 일하는 건 멋지지, 너무 많은 사람에 집에 가서 울고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라고 말해준 것으로 보아 이런 시간은 절대 흔치 않은 일이니까.



(왼) 고층 빌딩으로 가득 찬 미드타운 한복판에 이 정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오) 이렇게 사람 없는 구겐하임은 거의 초현실적이다 싶을 정도다.




3. 갤러리의 재발견

2022년 뉴욕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 중 하나는 갤러리 구경으로, 그것은 미술관과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세계에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홍콩, 파리, 런던 등과 더불어 뉴욕으로 향한다. 바바라 크루거, 백남준, 데미안 허스트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 그것도 그들의 따끈따끈한 신작 혹은 수장고에 있던 초기작품들을 뉴욕 갤러리에서는 그저 걸어 들어가 감상할 수 있었다. 그냥 들어가도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몇 곳에 대해 말하자면, 하워드 그린버그 갤러리와 데이비드 즈리위너, 그리고 페이스 갤러리, 가고시안 갤러리다. 갤러리들은 저마다 확실한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가는 실재한다>에서 썼던 의자와 함께 참여한 여러 사람의 얼굴을 띄워놓아 그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나름대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하워드 그린버그는 비비안 마이어를 포함해 80명이 넘는 작가들을 후원하는 사진 전문 갤러리였다. 내가 갔을 때는 미국 여성 작가들의 20세기 거리 사진을 모아 놓은 <A Female Gaze> 전이 열리고 있었고, 한구석에서는 그들이 이제껏 출판한, 전시와 관련 있는 내용의 도록들을 읽어보고 구매할 수 있었다. 작품 거래와 함께 출판으로도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맞지 않아 다시 방문하진 않았지만, 7월에는 국제사진센터에서도 전시하고 있는 사진가 William Klein의 작품들을 다루고 있었다.



(왼) 갤러리 전경. (오) 뉴욕의 길거리 가출청소년들을 피사체로 삼은 Mary Ellen Mark의 사진, 그 당시의 사회의 이면을 엿볼 수 있다.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는 마침 내가 방문했던 두 번 모두 페미니즘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을 다루고 있었다. 2월에는 여성의 자아정체성 발견에 일생을 바친 토니 모리슨의 <The black book>과 관련된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그룹전으로 묶어 전시하고 있었다. 7월에 돌아왔을 때는 이번에 모마의 대형커미션 작품을 맡은 바바라 크루거의 신작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자는 문학과 연계된 주제로 큐레이션을 했다는 것이, 후자는 사운드 설치작품과 대형 영상 신작들의 소리가 뒤섞이며 갤러리 전체에 기묘한 느낌이 풍기던 것이 인상 깊었다.


왼) 전시, 오) 바바라 크루거 전시. 전시의 주제와 분위기에 따라 아예 조명부터 달라진다.

바바라 크루거는 최근 시류에 맞게 사운드와 움직이는 효과를 추가했다. 속상하게도 동영상 첨부가 수월하게 안 되어 사진을 먼저 보이고 하이퍼링크를 준비했다.비록 간단한 효과더라도 훨씬 극적인 느낌이 더해지는 결과가 나온다. 궁금하다면 여기를 눌러서 동영상을 확인.


서울에도 지점을 둔 페이스 갤러리는 아예 건물 하나를 통째로 갤러리로 삼아 일 층부터 오 층까지(사무실 층은 제외해야 하지만) 여러 주제로 열리고 있던 전시를 볼 수 있던 것과 방문자에게 개방해 놓았던 그곳의 근사한 도서관이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세 번 방문할 때마다 데미안 허스트와 백남준, 마이클 하이저의 대형 작품들을 여럿 전시하며 위압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주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마이클 하이저의 전시 때에는 하나의 공간을 거대한 작품 하나만으로 채울 정도로 여백을 잘 사용하는 가고시언 갤러리는 항상 즐거운 충격을 주었다. 첼시 지역에만 두 개의 갤러리가 있어 가고시안 1, 2 모두 방문할 때마다 돌아보며 영감을 받곤 했다.


마이클 하이저의 최근 신작. 사람과 크기를 비교해 보세요..



백남준의 <촛불 하나>

분야별로 전문가를 따로 채용해 관리하는 규모 있는 갤러리인 만큼 그들은 작품을 매력적으로 연출하고, 배치하고, 파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눈이 즐거웠다. 자금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작품을 팔아 운영하는 곳이지만 누구나 편하게 들어가 감상할 수 있다는 낮은 진입 장벽 역시 흥미로웠다. 더운 여름에도 몸이 움츠러드는 겨울에도 항상 시원하거나 따뜻했던 쾌적한 공간. 모르는 작가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주었고 자금력과 풍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한 이런 갤러리에서 일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딜 가든 갤러리를 눈여겨보게 되겠지.


4. Sensory experience was best

여하튼 전시를 볼 수 있는 시간과 정신력은 한정된 만큼 매번 무엇을 보아야 할지 선택과 집중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미술관은 왜 이리 넓은지, 하루 만에 모든 걸 둘러보겠다는 건 크나큰 욕심일 때가 많았다. 나는 최대한 ‘겪을 수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려고 했다. 예를 들자면, 생각보다 작던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작품이나 털로 만든 잔 같은 개념 미술 작품들은 오히려 모니터로 더 크게 보일 것 같기에 빠르게 건너뛰고는 모네의 수련 앞에서, 이브 클라인의 블루 작품 앞에서, 마크 로스코의 색면회화 앞에서 최대한 오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그에 더해 직접 그 공간에 들어가야 느껴야 하는 작품들이나 감각적 경험이 동반되는 작품이라면, 놓칠 수 없었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예외, 작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정신성은 프린트와는 또 느낌이 다르다.


온갖 대지 미술/대형 설치작품들을 볼 수 있던 뉴욕의 디아 비컨. 공장을 고쳐 미술관으로 만든 곳은 그랜드 센트럴에서 기차로 1시간 반 이상을 와야 하지만 그럼에도 꼭 와봐야 했던 곳이다. 자연광으로 작품을 비추는 곳이기에 매시간 빛의 방향에 따라 전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역시나 널찍한 공간에 충분한 간격을 두고 배치한 작품들 속에서 커다란 규모의 작품들을 만나다 보면 조금 피곤해지려다가도, 지하에서 리처드 세라의 작품을 따라 걷거나, 지하에 들어가 온통 푸른 빛을 뿜어내는 댄 플래빈의 대형 작품을 바라보거나 영상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신성함에 정신을 잃은 것 같은, 마치 테크노 클럽에서 정신없이 춤추다가 러너스 하이가 찾아와 눈앞이 아득한 느낌으로 넓은 미술관을 헤맸다.


왼) 리처드 세라의 거대 설치작품, 관람객들은 저 사이를 따라 걸으며 조각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다. 나의 갈 길을 방해하는 조각물!
오) 댄 플래빈의 대형 설치작품. 빛의 장난으로 저 속에서는 밖 풍경이 핑크빛으로 보여서 무슨 일인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다.


마이애미의 루벨 미술관(Rubell Museum)에서 보았던 쿠사마 야요이의 거울 룸(Infinity mirrored room : Let’s survive forever, 2017)이다. 루벨 미술관의 25달러 입장료도 모자라(이건 미술관협회 멤버십 혜택도 유효하지 않은 곳이었다) 추가로 5분간의 거울 방 관람에 10달러를 내야 했지만, 망설임 없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 떠 있는 구슬들과 서로 반사하는 거울들을 통해 무한히 펼쳐지는 시야.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그가 평소에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무한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쿠사마의 편집증이 만들어낸 공간은 정말로 신비로웠고, 시간에 따라 아름답게 빛바랜 구겐하임 건물 안에서 거닐던 시간처럼 5분은 50초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Let’s survive forever, Kusama @Rubell museum

또 The Shed에서 보았던 토마스 사라세노(Tomas Saraceno)의 작품 : Free the air도 즐거웠다. 다양한 동시대 미술을 선보이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인 The shed가 그에게 맡긴 커미션 작품에서 그는 거미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모든 소지품을 맡기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가 우리는 그가 조밀하게 짜낸 거미줄 같은 천막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자리를 잡았고, 안개로 가득 찬 천장을 바라보다 어느새 공간이 어두워지면 10분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와 움직임, 진동으로 바닥에 둥 떠서 잠시간 거미가 되어본다. 신비한 기분과 더불어 안전과 경제적 계산 등을 전부 관리해 이걸 가능하게 하는 기술력과 실행력 또한 무엇보다 인상 깊었다. (게다가 LOWER LEVEL에서 진행되는 체험은 어세시블인데 이것까지 고려했다) 항상 이렇게 관람객을 속절없이 어떤 상태로 끌어들이는 작업/공간을 꿈꾸고 있는 사람(그리고 핸드폰을 그들에게서 잠시나마 뺏고 싶은 사람)으로서 참고하기 좋은 레퍼런스 아니었나.


연기가 자욱한 인공 거미줄 위에 누워 빛을 바라보다 보면 점차 방은 어두워지고 .. Commissioned by The Shed. Photo: Nicholas Knigh

미술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손에 잡히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에, 관람객들의 경험을 증진시킬 방식은 단순히 사진을 찍어 남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감흥을 선물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들을 먼저 풀어낸 좋은 사례들은 뉴욕의 아트씬에서 계속계속 눈이 갔다.



MOMA 벽에 붙어있던 좋아하는 말


Nothing is Permanent! Change is modern. Artist change how we see the world and how we feel.